프리뷰
본인이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인상깊었다는 친구를 따라 햄넷을 보러 갔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를 참고한 소설 '햄넷'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시청하기 전까지 이 사실을 몰랐으며, 셰익스피어 또한 이름만 알지 관련된 지식이 없어서 그냥 '16~17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인지하고 10관에 들어가 영화를 시청했다.
상당히 괜찮은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며 폭싹 속았수다(이하 폭싹이)의 동명이 관련 에피소드가 생각났는데, 이 이야기를 함께 표현해볼 생각이다.
비주얼 : 색감, 촬영, 작화, 그래픽(CG)
⭐️⭐️⭐️⭐️⭐️
16~17세기 배경을 잘 표현해주었다. 영화 초반에 출연한 매는 분명 CG겠지..? 참 자연스러운 매라고 생각했다.
인물 : 연기력, 캐릭터 매력, 관계성
⭐️⭐️⭐️⭐️⭐️
아녜스와 윌 모두 매력있는 캐릭터였다. 동명이 관련 에피소드가 생각났는데, 아이를 잃은 부모의 감정은 양 작품의 부모 모두에게서 전해진다.
연출 : 속도감(템포), 편집, 감독의 스타일
⭐️⭐️⭐️⭐️⭐️
내용이 어렵지 않으며, 의미없는 장면이 없었다. 적당한 사운드, 적당한 연출.
스토리 : 자연스러운 전개, 이음새, 흥미
⭐️⭐️⭐️
이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는게 많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스토리 자체가 흥미롭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주인공인 아네스의 '미래를 보는 능력'은 지속적으로 표현되지만 영화에서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햄넷이 주디스를 대신해 죽음에 이르렀는데, 현실적인 어떤 이론으로도 햄넷이 어떻게 주디스에게 삶을 선사할 수 있었는지 시사하는 바가 없다.
나는 '우리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으니까 이정도 설정은 그냥 받아들여' 정도로 느꼈다.

아쉬운 점 먼저
스토리와 영화의 설정이 조금 아쉽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미래를 보는 아네스의 능력은 극 중 없어도 되는 장치였다. 그녀가 예언한 미래는 노력이나 상황이 변함에 따라 쉽게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미래를 이야기하는 아네스의 대사를 보면서 스토리를 따라가던 중 길을 잃었다.
대표적으로 쌍둥이를 출산하는 아네스는 '나의 임종을 보는 사람이 당신 둘이었군요'라며 죽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녀는 문제없이 몸을 회복하며, 태어나며 사망한 줄 알았던 주디스도 역병을 맞기 전까지는 건강하게 자란 모습이다.
아네스의 '나의 임종을 보는 두 사람'은 영화중 더이상 언급되지 않으며, 더이상 그녀가 죽음의 위기를 겪지도 않는다. 의미심장하게 지켜봤던 저 문장은 결국 사용되지 못하고 영화는 끝났다.
비슷한 결로, 윌리엄이 '할아버지를 가까이 하지마.' 라는 대사를 햄넷에게 말한 것도 할아버지의 사망소식이 한 줄의 대사로 전해지며 무색해진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가 전하고자하는 바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요소들이지만...
이 영화를 내가 다시본다면 적어도 스토리가 흥미롭거나 재밌어서는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칭찬할게 훨씬 많다.
아이를 잃은 부모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는 '참척(慘慽)'이라 하여, 그 슬픔을 헤아릴 길이 없어 단장지애(창자가 끊어지는 아픔)로 표현.
‘아내 잃은 남편은 홀아비, 남편 잃은 아내는 과부, 부모 잃은 자식은 고아라고 하지만, 자식 잃은 부모를 일컫는 단어는 없다'
유명한 말들이다. 애완동물조차 제대로 키워보지 못한 나는 내가 애지중지하던 자식을 잃는다는 아픔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아네스의 통곡하는 장면은 나의 자식을 먼저 떠나보냈을 때의 고통을 상상하게 한다.

폭싹이에서는 동명이가 부모를 찾으러 나선다. 부모가 보고싶어서, 공포에 휩싸여서 그들을 찾아 비바람을 뚫고 집 밖으로 나선다.
햄넷은 어머니인 아네스가 체력적으로 지쳐 잠을 청할 때, 주디스의 옆으로 가서 그녀의 죽음을 자신에게 옮겨온다.
두 작품에서의 부모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잠깐 사이에 마지막으로 본 멀쩡했던 아이들이 주검으로 돌아온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네스 또한 주디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의 죽음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을 자고 일어나니 싸늘해진 시체는 햄넷이었다.
아네스의 입장에서는 하루사이에 두 아이의 죽음, 또는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해야했다.
어쩌면 그냥 한 아이를 잃는 것보다 배로 고통스러웠을지도.
하지만 그들은 살아가야한다.

개인적으로 폭싹이에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금명이와 은명이는, 동명이의 죽음을 자신의 탓을 하며 부모의 눈치를 보며 지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보고 부모는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며 다시 살기위해 힘을 낸다.

주디스 또한 자신을 대신해 죽음을 맞이한 햄넷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다.
햄넷의 시체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아네스는 주디스의 잘못이 아니라며 그녀를 꼭 안아준다.
그래서 아네스는 햄넷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살아간다. 남은 두 아이를 위해.
부모는 정말 강한존재다.
잊혀지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아네스는 햄넷을 가슴속에서 놓아주지 못한다.
아네스는 주디스를 살리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계속 사용하고, 그녀 옆에서 잠깐도 떨어지지 않았다. 햄넷이 주디스의 죽음을 가져가 주검이 되었을 때도 다시 햄넷을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사신은 햄넷의 생명을 거두어갔다.
그리고, 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의 아들을 만나야 했다.

차라리 내 주변 사람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연극을 성공시키기 위해 런던으로 떠나는 윌은 가족과 더 큰 집, 더 좋은 환경에서 살 꿈을 꾸며 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비보가 들려왔고, 가족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윌은 잠시 슬퍼하다가 다시 런던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리고 런던으로 떠난다고 아네스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주디스가 아픔을 겪을 때도, 햄넷이 죽음을 맞을때도 곁에 없었던 윌은 할 일이 있다고 런던으로 떠난다고 했다.
윌은 햄넷의 죽음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아네스 또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폭싹이에서 관식은 그가 병에 걸려 온 몸에 고통을 느낄 때도 동명이를 잊지 못했다.
고생했던 경험도, 고통을 받았던 경험도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고 추억 보정이 된다고 하지않나. 하지만 감히 소중한 사람, 그것도 나의 자식을 잃은 기억은 평생을 고통속에 살 것이다.
당사자는 그렇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모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과연 자식을 잃은 부모의 주변 사람들 또한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는 안타까움과 동정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함께 고통받지는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조차 희미하게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부모와 죽은 자식의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자식을 잃은 고통은 모두에게서 잊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윌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기는 방식으로 햄넷을 추모한다.
예술은 역사를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한국은 아픈 역사를 딱히 가리지 않는 것 같다. 다른 국가에서 봤을 때는 치욕적일 수 있는 역사더라도, 한국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아픈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 중 정말 대중적으로 자리잡은게 '영화' 다.
625 전쟁을 기리는 포화속으로, 518 광주 운동을 기리는 택시운전사, 그리고 서울의 봄, 연평해전 같은 근대의 역사를 다룬 영화들뿐 아니라 관상, 왕과 사는 남자, 명량 등 먼 과거의 역사를 다루는 영화도 한국에 정말 많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당시 고통을 겪었을 주인공들에 감정을 대입하며 역사를 기억한다.
윌은 이렇게 햄넷을 추모하려고 했다.
모두의 마음에 와닿는 연극

우리는 왕과사는남자를 보며 단종과 그의 생애를 기억하게 됐다.
영화의 배경인 16세기에는 햄넷과 햄릿을 딱히 구분짓지 않고 같은 이름으로 봤다고 한다. 그래서 윌은 자신의 연극에 '햄릿'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가끔 부모와 관련된 다큐를 보면 자신보다 자식의 꿈을 우선으로 하는 부모들을 볼 수 있다. 내가 입는 것, 먹는 것은 대충 처리해도 자식에게 주는 것은 새것을 주고싶어 한다.
윌 또한 그랬다. 윌은 햄릿을 맡은 배우에게 정말 엄격했다. 그의 대사가 서투를 때마다 지적하고, 감정이 살지 않아 다시 연습하게 했다.
연극에서의 햄릿, 그러니까 아들의 꿈을 더 퀄리티 있고 완벽하게 이뤄주고 싶었을 것이다.

윌의 연극에서 햄릿의 아버지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유령이 등장한다.
그리고 말한다.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자신의 아들 햄넷 대신 자신이 죽을 수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네스가 햄넷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심장을 꺼낼 수 있다고 했던 것 처럼.

아네스는 윌이 이런 비극적인 연극이 아닌, 사람들에게 재밌는 연극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들이 죽음을 맞았을 때, 런던으로 빨리 떠나려는 그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극을 보며 그녀는 이해했다. 윌이 얼마나 햄넷을 기리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막스인, 죽음을 앞둔 햄릿에게 아네스를 시작으로 모두가 손을 뻗는 모습.
관객들은 이 연극을 통해 햄릿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마음 깊이 기억하게 되었다.
아네스 또한 이 연극의 관객이다. 그녀 또한 햄릿의 기억을 이 예술 작품을 통해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슬픔이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모두가 같이 햄릿을 기억해 줄 것을 알게 된 순간.

오르페우스 신화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 음악가다. 그의 아름다운 연주에 감동한 하데스는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으로 아내를 돌려보낸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끝내 뒤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사라진다.
(chatgpt 요약 ㅎ)
이 영화의 극 초반에 오르페우스 신화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단순히 뒤를 돌아봤다는 이유로 아내를 저승에서 데려오지 못했다는 이야기.

윌이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연극에서 퇴장하려고 하는 순간, 아네스는 관객석에서 말한다.
뒤 돌아서 나를 봐줘
그리고 윌은 몸은 퇴장로를 향한채 고개를 돌려 아네스를 본다.
이 장면은 앞서 언급한 오르페우스 신화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윌이 아네스를 저승에서 데려오는 장면은 당연히 아니지만, 윌이 뒤를 돌아봄으로써 '무언가를 놔주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네스의 마음속에서 햄넷을 다시 이승으로 데려오는 행위를 수천번, 수만번 했을 것이다.
어쩌면 '돌아본다는 행위'는 저승에서 다시 햄넷을 데려오는 행위를 이제는 놓아주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마무리
클라이막스의 연극 장면은 추후에 다시 한 번 보고싶다. 관객들이 손을 뻗는 장면에서 큰 전율을 느끼며, 예술이 단순하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기억과 마음속에 '감정'을 남겨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깊이 심어준다.
'즐거운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화 그 자체' 였던 햄넷.
친구 덕분에 좋은 영화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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